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금척리 고분군 (문단 편집) == 개요 == 金尺里 古墳群 [[경상북도]] [[경주시]] 건천읍에 위치한 [[신라]]의 고총 고분군이다. [[대한민국의 사적|사적]] 제43호로 지정되었다. 건천 금척리 일대는 [[서라벌|신라의 수도]]의 교통의 요충지로 경주의 한반도 내륙 방향 육로교통의 관문과 같은 지역이다.[* 그러한 맥락에서 4세기 이전부터 건천읍 주변에는 사라리 고분군이라는 대형 목곽묘 고분군이 형성되기도 했다.] 지금으로 치면 [[서울]]의 [[과천]] 같은 곳이다. 4세기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5~6세기에 완성된 신라의 대형 고분군으로써 [[대릉원]] 일대의 고분군 다음으로 고총들이 많다. 대릉원과 비슷한 풍경을 가진 곳으로 대릉원이 경주 분지에 형성된 후, 7세기 이후부터 [[당나라|당]]의 영향으로 방리제(方里制)[* 바둑판처럼 도로를 만들고 도시를 구획하는 제도. 도로에 의해서 사각형의 공간이 생기므로 모날 방(方)자를 쓴다.]를 시행, 규격화된 거리로 구성된 도시를 만들었다는 것이 금척리 고분군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. 바로 뒤에 방리제의 흔적들이 발굴[* 방내리를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다. 동네 이름은 방의 안의 마을, 즉 도시의 안쪽 마을이란 뜻이다.]조사를 통해서 드러났다. 경주처럼 도시 한가운데에 무덤이 있는 특유의 형태로 도시경관이 형성되었다. [[http://m.news.naver.com/read.nhn?mode=LSD&mid=sec&sid1=103&oid=028&aid=0002229300|관련 기사]] 이런 특성으로 볼때 금척리 고분군은 관광자원으로 정비되어 활용될 여지가 많다. 발굴은 일제강점기에 되었으며, 원래 형성되있던 도로를 가도로 만들면서 훼손된 일부 고분에 대한 수습조사가 전부다. 조사보고서조차 없다. 해방 이후에 또 조사를 했지만 2021년까지 정식 보고서가 없었다.[* 1952년, 1976년, 1981년 조사 후 보고를 했으나, 현대 기준으로 상당히 부실한 약식보고였다. 그나마 국립경주박물관에서 2021년에 1981년 조사에 대해서 정식보고서를 발간했다.] 이후 금척리 고분군에는 발굴과 보고의 체계가 정립된 90년대 이후의 발굴은 없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